이준석 신드롬? 새로운 감성정치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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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식과 상식, 정의와 공정 사라져... 결국 망각사회로 전락!
- 이성과 감성 사이의 갈등과 조화가 바로 선진정치
- 대통령의 존재 가치, 현 정권 들어 갈수록 회의적

 

제국주의와 미국의 탄생

 

제국주의시대에 펼쳐졌던 열강의 과도경쟁은 ‘국제공법(國際公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위 근대국가를 만들어 낸 ‘문명국(文明國)’으로 불리어지는 서양의 대표주자는 단연코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은 문명의 척도로 ‘법치’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들의 공적영역에서의 시민성 (Civility)을 내세웠다. 프랑스는 언어와 문화, 외교와 예술적 가치를 우선시했다.

 

한때 해가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과 대비해서, 나름대로 엄청난 식민지개척 경쟁구도를 갖추었던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독립을 원하는 미국과 손잡았으며,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미국이 독립을 쟁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세력을 제거한 이후, 미국보다도 더 큰 방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던 프랑스 영토들이 점진적으로 미국에 의해 합병되었다. 이제 프랑스가 점령했던 그 광활한 북미대륙에서의 흔적은 캐나다의 몇몇 주에서만 겨우 확인될 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는 신사의 나라 영국과 문화·예술의 나라 프랑스가 갖는 각각의 체화된 시민들의 습속 (Mores)이 달라서였다고 볼 수 있다. 토크빌 (Alexis de Tocqueville)은 이에 대해 내면의 감성에 쉽게 빠져드는 프랑스의 습속이 영국의 공법제도 (Common Law)를 흡수했고, 종교적 정신 (Puritanism)으로 무장한 독립당시의 미국 정치지도자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의 감성위주의 습속은 당시 미국이 추구했던 영국의 공법에 의거한 ‘배심원 제도’(Jury Pool System)와 같은 법제도와 소규모 지방자치체 (Township)와 같은 자치 능력과 종교적 개척정신 (Frontierism)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개척정신으로 확대된 영토는 연방제도와 지방자치를 기반으로 하는 법과 제도의 뒷받침으로 오늘의 광대한 미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성에 기반을 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문제의식도 어쩌면 인간의 감성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여 진다. 몽테뉴, 파스칼, 몽테스키외, 루소, 토크빌로 이어지는 프랑스철학의 계보에서도 이들의 주된 관심은 전통적 습속에 접목된 인간의 감성을 어떻게 다른 차원의 감성으로 관리·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프랑스처럼 문화적 습속이 강하고 복잡한 사회구조를 가진, 자기이익에 몰두하는 인간들을 어떻게 사회와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은 특히 법철학, 정치 및 사회제도에 대한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해결책을 도모했던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루소 ‘사회계약론’,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의 사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감성이 지배하는 공화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감성을 억압하는 중앙행정권력을 거듭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강화된 공권력은 항상 프랑스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는 프랑스 내부에서 오랫동안 혁명과 반혁명의 급진적인 사회 변혁들을 유발시켰다.

프랑스 혁명이후 2백년이 지난 작금에 와서도 프랑스인들의 감성적 습속은 그 고질적인 프랑스적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급기야 프랑스적 정치문화를 경험한 구식민지국가들이나 아프리카와 아랍 등, 주변국가에서 영입된 이민자들에게도 이런 감성적 선전·선동과 정치적 접근방법들이 전파되어, 더욱 심각한 프랑스적 정치사회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권위주의 정치체제 (Authoritarian Political Regime)

 

조선 5백년과 일제식민시대를 거치면서, 과연 한국인의 습속 (Mores)은 어떻게 규정되어 질 수 있나?

참으로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원시적 감성을 가진 유교적 ‘신민(臣民)’에서 갑자기 건국혁명을 통해 ‘벼락국민(國民)’이 되어버린, 참으로 흔치 않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인식과 영향을 언급하기 이전에, 감성적인 원시적 습속자체가 너무나도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태에서 조선의 한국인은 대한민국의 ‘벼락국민’이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토지개혁과 6·25전쟁으로 그 어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가능성도 절멸된 상태에서, 원시적 감성에 절어있는 벼락국민들을 선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강력한 행정적 통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유교적 습속과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고질적인 ‘연고의 원심력’을 억누를 수 있는, 장기간에 걸친 권위주의 정치체제 (Authoritarian Political Regime)를 형성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벼락국민들의 감성을 관리하고 절제시키는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국가운영과 분명한 미래비전은 결과적으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역사 이래 최대의 대한민국 발전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후 2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국에서는 소위 ‘1987체제’가 형성되었다.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지난 30여년 동안 '벼락국민'들의 원시적 감성들이 아무런 관리기재도 없이 무절제하게 대한민국 천지를 뒤덮어 버렸다. 그리고 얼치기 사회주의자 또는 종북 김일성주의자들이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철저하게 대한민국의 제도권에 파고 들었고 급기야 이들이 정치권력마저 장악해버렸다.

 

 

프랑스혁명 후에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개인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프랑스인들이 그 후 100년 이상의 정치적 격동기를 경험했다. 이와 유사하게, 이승만의 건국혁명 이후로 '벼락국민'이 된 한국사회의 원시적 ‘감성팔이’ 국민들도 ‘민주화’라는 미명아래 상당한 기간 동안의 정치적, 이념적 격동기를 또다시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지난 2백 년 동안 프랑스사회가 경험했던 정치적 격변이 시대적 학습효과로 현재의 대한민국에 작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지금 대한민국 '벼락국민'들이 치루고 있는 어려운 시험의 답안지를 이미 프랑스가 대한민국에 제공해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정치가들이 단 한번도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훼손하지 않았으며, 삶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지난 73년 동안 지탱해 왔다는 ‘삶의 학습효과’가 대한민국 벼락국민들의 습속에도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준석 식의 ‘개성’과 ‘공존’

 

며칠 전, 제1야당 당대표로 이준석이라는 36세 ‘정치신동(?)’이 등장했다. 세계적인 뉴스거리로 한국사례가 신기하고 역동적인 형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임 당 대표는 ‘개성’과 ‘공존’을 자신의 정치적 목표로 내세웠다. 그런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내심 잡다한 걱정들이 앞선다.

 

과연 이준석이 강조하는 ‘개성’에서 자유민주주의사회의 ‘개인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통합의 의미로서 ‘공존’은 지금까지 문정권이 펼쳤던 대한민국 파괴행위를 향후 그냥 덮어버리자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준석의 등장은 분명히 감성팔이에 따른 극단적인 한국적 쏠림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원초적이며 원시적인 감성을 조금 더 진보된 감성으로 누르는 상황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감성이 기존의 감성을 누를 때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격변이나 극한 대립이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두 가지 현상 모두가, 대한민국 헌정질서를 수호하고 발전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는 큰 장애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현상은, 새로운 감성의 등장으로 문정권이 붕괴되고,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다 하더라도 오랜 기간 아스팔트를 가득 메운 감성 대 감성의 충돌양상을 앞으로도 피해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결국 신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감성을 제압하기 위한 관료조직의 강화 또는 새로운 행정독재를 구축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두 번째 현상은, 이미 한국사회는 정의와 공정, 양식과 상식이 무너진 상태에서 새로운 감성팔이로 인해 정치·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할 경우, '벼락국민'들은 바로 사회문제에 등을 돌리고 정치적 무관심으로 빠져들 가능성도 높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현 정권의 위세를 시민사회가 넘어서지 못하고, 차기정권도 문정권을 이어가는 동질적인 정권으로 재탄생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기야 문정권이 시도하는 정의와 공정, 양식과 상식의 파괴는 대한민국 '벼락국민'들을 망각의 세계, 다시 말해 정치적 무관심의 세계로 유도하는 그들의 뛰어난 책략중 하나이기도 하다.

 

흄 (David Hume)이 강조했듯이, 이성은 분명히 감성의 노예다. 그러나 정치세계에서는 항상 이성과 감성은 조화되어야 한다.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의 습속 (Mores)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성찰하는 인간으로서의 휴머니즘 (Humanism)을 지닌 ‘개인주의’의 확립이 결정적이다.

 

 

하버드대학을 나온 36세의 신임 야당대표가 감성적인 '벼락국민'들에게 새로운 개인주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 젊은 지도자가 국민을 설득하고 새로운 여론을 창조하는 정치지도자의 덕목을 실현할 수 있을 까?

뭔가 현상을 크게 바꾸기는 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그 보다도 더 못한 상황으로 빠져들지는 않을까? 여전히 여러 가지 거친 걱정들이 줄을 잇는다.

 

이들 중 제일 큰 걱정은 현실경험과 사상적 근거가 없는 이준석 식의 감성적 선전·선동으로 인해, 급기야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들어 내었던 아버지세대와 감성적이며 이기적인 아들세대들 간에 심각한 대립과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참으로 암울하다.

 

 

강 · 량 <정치학박사 /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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