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아편에 취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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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의 명예와 시민의 덕목은 사라진지 오래
- 야바위꾼-사기꾼-정치꾼 위정자들에 탈취당한 대한민국...
- 비무장(非武裝) 부자는 무장한 빈자에게 늘 도륙 당해!!

 

하비 멘스필드 (Harvey Mansfield) 교수의 명저 '남성적인 것에 대하여'(Manlyness)에서 가장 바람직한 남성의 자세는 바로 ‘철학하는’, ‘사유하는 남성성’(Philosophical Manlyness)이다. 이는 남성성에 대한 과학적-생물학적-진화론적 접근이 아닌, 철학적·인문학적 탐구의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남성적이지 못한(Unmanly) 정체성과 지나치게 귀족화된 젠틀맨적인 정체성 사이에서, 적절하게 절제된 중간지역을 형성하자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거칠기 짝이 없는 남성성이 이런 사유의 경지에 오르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결국 신념에 대한 지나치게 완고한 독립적 사고를 성찰해 가면서, 충동적·악의적 남성성을 억제하고, 절제된 중용의 덕목을 실현시키는 남성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한마디로 전혀 일반적이지 못하다.

 

용맹이라는 시민의 덕목

 

희랍시대에 남성의 ‘용맹’(Thumous)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육체를 바치는 행위로서, 희랍의 철학자들로부터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플라톤은 남자의 용맹과 기개야말로 자기존재를 지켜내려는 ‘야수적 본능’이라고 비평했다. ‘정치적 동물’로써 인간을 규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용맹과 기개는 결코 시민의 덕목(Virtue)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고 평했다.

21세기 양성평등사회에서 이런 저런 여성들의 눈치를 보자니, 사유하는 남성성이 바람직 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타난 바 인류역사는 허세와 허풍의 남성성이 용맹과 기개로 변신해서, 마치 한번에 에너지가 폭발하듯이 계단식으로 혁명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부족국가가 물질적 풍요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통해 상대 부족국가의 소유물을 빼앗아 오거나, 인신을 노예화하는 것이 가장 빠른 혁명적 발전의 지름길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을 통해 풍요로워진 인류는 이성을 통한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의 제도와 사상을 공고화했다. 이를 법과 제도로 일반화하면서 인류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용맹과 기개를, 슬쩍 사유하는 남성성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맹목적인 남성적 투쟁 본능과 신념의 완고함은 허무주의와 초월주의, 실존주의와 유물론적 해방론 등과 연결된 여성성에 기생하는 공산주의적 권력투쟁 논리로부터 지독한 도전을 받았다. 이제 허풍과 허세, 용맹과 기개를 앞세우는 남성성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다.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의 돌연변이로부터 파생된 문화적 상대주의로 얽혀있는, 이상한 ‘법과 제도’에 눌려서 스스로 남성성을 포기해 버리는 암울한 처지에까지 내몰리고 있다.

 

시쳇말로 자유주의와 합리주의로부터 발현된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 Collectiveness) 법치주의와 문화적 상대주의를 내세우는 지구촌의 모든 문명국에서는 위대한 여성성에 도전하는 간 큰 남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와 입헌민주주의국가를 문명국으로 칭하고, 종교적·정치적 신정 또는 인민독재를 일삼는 국가들을 비문명국으로 칭한다면, 비문명국 권에서는 넘쳐나는 거친 남성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정치적·종교적 독재와 결부된 이런 야만적 남성성을 옹호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들 또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나름의 힘과 마력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북한의 야만성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작금에 일어나는 상황에서 보여 지듯이, 종교적 신념을 지키려는 야수적 본능에 충실한 원시적 탈레반들에게 지구촌 최강의 군대를 가진 미국을 포함한 서양 동맹국들이 꼼짝없이 이 야만적 남성성으로부터 모멸을 당하고 있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부족 간 노략질에 기반을 둔 장기적인 게릴라전에 미국도 두 손 다 들어버렸다. 현재 카불 내 미국인들조차도 제대로 철수시키지 못한 채, 카불공항을 둘러싸고 탈레반과 대치정국을 펼치는 미국은 아마도 건국 이래 최대의 치욕적인 국가적 수모를 당할 것 같다.

 

 

이런 카불 상황과 연관해서, 지난 73년간의 남북 분단 속에서 북한지도자가 갖고 있는 야만적인 남성적 본능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아왔던 대한민국으로서는 작금의 탈레반이 펼치고 있는 야만적 광경이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내부적으로 문민정부의 등장이란 말과 함께 민주팔이와 평등팔이가 성행했다. 이를 틈타 ‘페미니즘’과 ‘젠더’문제를 놓고 온갖 허무주의와 초월주의, 실존주의를 빙자한 유물론적 해방론이 판을 쳤다.

그리고 문화적 상대주의에 입각한 현실부정과 도피, 물질적 이기주의가 빚어낸 몽상적 사회주의논리가 사회전반에 만연히 퍼지게 되었다.

 

조선의 남성다움, 선비정신

 

그 결과 지난 세월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기적의 역사와 그 속에 존재했던 위대한 지도자들의 영도력은 해체되고, 민중 또는 인민이라는 근거 없는 집단적 야만세력들이 등장해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위대한 지도자들을 민중의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기사도와 사무라이정신이 문화적 습속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서양과 일본에서 가장 많은 문학과 영화의 주제거리는 당연히 대의를 위해 또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용감한 ‘남성다움’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그런 남성다움이 없었나? 소위 ‘선비정신’이란 이름으로 조선선비의 남성다움은 오랜 세월 존재해 왔었다. 한 예로 세조에 대항했던 사육신의 ‘선비정신’과 이순신의 위대한 남성성은 아직도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을 자살로 유도하고 있는 문정권의 주사파 위정자들은 대의와 명예를 존중하는 남성다움을 갖추었나?

언뜻 탈레반과 같은 종류의 지독한 종교적·문화적 습속이 떠오르지만, 일단 이상을 위해 육체를 바치는 그리스적 ‘용맹’ (Thumous)과 부분적으로 흡사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운동권이란 이름으로 오랜 세월 풍찬노숙 해왔고, 수직적 기율과 동지애, 그리고 목숨을 던지는 ‘인신공양’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멘스필드교수가 강조했듯이, 이들의 타락한 남성성은 성찰 없는 맹목적인 아집과 독선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고, 결국 권력추구라는 약탈적 요소로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과 동일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자신의 신념과 명예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전통적인 남성성은 상대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위선과 기만·사기와 거짓말과 같은 불명예스러운 방법들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들은 언제든지 위선과 기만·사기와 거짓말을 십분 이용한다는 점에서, 탈레반이나 북한의 백두혈통이 갖는 남성성과도 차별시켜야 할 것 같다.

 

 

야만(野蠻)에 맞서는 야당(野黨)의 헛발질

 

결론적으로 문대통령을 포함해서 문정권 주사파 위정자들은 북한과 중국에 존재하는 야만적 남성성을 흉내 내려는 것 같다. 그러니 원본을 벗어난 아류는 항상 질적인 문제로 고통을 받는다. 다시 말해 이들의 담고자하는 노력들은 가상해 보이지만, 목적과 방법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언사에서 중국과 북한의 야만적 남성성과 비교해도 상대적인 격이 한참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문대통령과 여당은 국회에서 자신들의 독재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온갖 법들을 다 실행시키고 있다. 반면에 이에 맞서는 대한민국 언론과 야당은 이 정권 시작시점부터 지금까지 이들의 비루한 야만적 남성성에 제대로 맞서서 대항해 싸운 적이 없다.

분명한 것은 불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양아치 또는 산적 떼거리라고 비아냥거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쟁취라는 목적한 바를 놓고, 칼과 창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에게 법과 제도로-정치로-말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이들을 달래려고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그와 동일한 방법인 칼과 창으로 대응해야 그나마 국가와 가족, 믿음과 가치, 대한민국의 역사와 미래를 지킬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건국혁명과 산업화혁명을 이루어 낸 위대한 지도자들 덕분에 물질적 풍요를 보장받았으면서도, 이기적인 태만에 빠져있는 대한민국 남성성은 이제 싸우는 방법을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풍천노숙하며, 부족적인 집단사고에 빠져있는 야만의 무리들에게 언제든지 당할 수 있는 긴박한 위기상황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몽상적인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그림만을 상상하면서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전사의 용기와 희망

 

도시국가 간 또는 강대국 사이에서의 잦은 전쟁으로 피렌체의 아르노강이 늘 피 빛으로 물들었던 상황에서 청년 마키아벨리는 항상 경고해 왔다. “무장하지 않은 부자는 언제나 무장한 빈자에게 도륙당한다”고 말이다.

이미 물질적 풍요라는 아편에 취해 있는 대한민국은 북한을 숭배하고 권력을 탐하는 얼토당토않은 권력양아치 집단들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그리고 더 큰 위협은 내부의 권력양아치들보다 더 굶주리고 더 야만적인 북쪽의 남성성으로부터 언제든지 국가와 가족, 믿음과 가치, 명예와 생명을 빼앗길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처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남성성은 희랍의 '용맹'(Thumous)도 아니고, 멘스필드교수가 강조한 '사유하는 남성성'(Philosophical Manlyness)도 아니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강조했던 탁월함을 갖춘 '전사의 용기'(Virtu)일 뿐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리더십에는 바로 이 탁월한 남성성인 ‘전사의 용기’가 서려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타난 야당의 대선후보들 중에 과연 누가 이런 탁월한 남성성인 ‘용기’(Virtus)를 갖고 있을까?

 

터널도 그 끝이 있기 마련이니 그래도 희망을...

 

강 · 량 <정치학박사 /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초청시론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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